RE:view) 추락의 해부(2023)

<추락의 해부Anatomie d'une chute, 2023>를 보고 떠오르는대로 남기는 글 입니다.
※ 주의: 영화의 주요 장면을 설명 또는 묘사한 내용이 있으니 영화를 볼 예정인 사람들은 주의 바랍니다.

영화는 대충 이렇습니다

독일인 작가 산드라와 사뮈엘 부부는 시각장애를 가진 아들 다니엘과 1년동안 외딴 산간지역에서 지낸다.
산드라와 다툰 사뮈엘이 집 밖에서 죽은 채 발견되고, 자살과 살인 중 의심스러운 정황 가운데 산드라가 용의자로 기소된다.
1년 후 다니엘은 어머니의 재판에 참석한다.
- <추락의 해부> 시놉시스

제가 영화를 보러가기 전에 많은 정보를 담아가는 편이 아니라 이 영화가 작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정도만 알고 보러 갔습니다. 심지어 이 영화가 프랑스 영화라는 것도 영화 시작화면을 보면서 알게 되었거든요.

두번 말하지만 <추락의 해부>는 프랑스 영화입니다. 감독도 쥐스틴 트리에라는 프랑스인이죠. 제가 가지고 있는 프랑스 영화에 대한 편견 중 하나는 "말이 겁나게 많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법정 드라마는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를 논박하는 과정을 다루는 드라마이기에 대사가 많습니다. 프랑스 감독이 만든 프랑스 법정 드라마 영화라니. 정말로 말이 많을 거 같고 실제로도 말이 많습니다.

말이 많은 것에 비해 영화는 상당히 건조합니다. 영화 화면의 질감도 그렇지만 법정에서 말이 많은 것에 비해 격정적이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굉장히 차분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감독인 쥐스틴 트리에가 다큐멘터리로 커리어를 시작한 것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럼 저는 말 많고 건조한 프랑스 영화를 보고 무엇을 생각했기에 이런 글을 남기는걸까요?

추락과 해부

추락 → 해부

사뮈엘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사망합니다. 사뮈엘의 해부(=부검) 결과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상처에 대해서 부검 결과를 이상하게 말합니다. 둔기에 맞은 거 같기도 하고 어딘가에 부딪친 거 같다고도 하다고 합니다. 부검은 사인을 명쾌하게 밝히기 위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사인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합니다.

산드라와 다니엘의 명확하지 않은 증언과 부검 결과를 바탕으로 경찰과 검사는 사고사나 자살이 아닌 살해라고 생각하고 그 시간에 유일하게 집에 있던 산드라를 살해 피의자로 기소합니다.

어떻게 떨어진 것일까요? 산드라(그리고 변호인은) 다락방에서 작업을 하다 떨어져 사망했다고 주장합니다. 검사는 3층에서 말싸움을 하다 산드라가 무언가로 사뮈엘의 뒤통수를 치고 휘청거리는 사뮈엘을 밀어 살해했다고 주장합니다. 같은 추락에 대해 보는 방식이 다르군요. 무엇이 진실일까요?

추락한 사뮈엘의 시신에 해부(=부검)을 진행하였지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해부 → 추락

검사는 산드라가 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하나같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가정 내 불화가 있었다. 산드라의 소설에 비슷한 내용이 있다. 사망 전 날 다툼이 있었다. 하나같이 살해의 동기일 뿐 방법은 아닙니다. 방법은 3층 베란다에서 머리를 가격하고 밀었다. 그렇다면 그 흉기는 어디있는가? 몰?루?

변호사는 산드라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로 가려하진 않습니다. 오로지 검사의 증거를 반박할 뿐이죠. 가정 내 불화가 있었다? 근데 뭐? 그런 거 없는 부부도 있나? 산드라의 소설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그럼 스티븐 킹은 연쇄 살인마냐? 어떻게 죽었냐? 4층 다락에서 떨어져죽었겠지. 왜 떨어졌는지는 알아야해?

재판이 진행될 수록 사뮈엘과 산드라가 추락합니다. 밝은 모습으로 열정적으로 강의하던 사뮈엘 교수는 아들을 방기해 장애를 입히고 출판사에 보낸 글은 거절당하고 집에서는 쭈구리인 사뮈엘로 추락하죠. 지적인 작가였던 산드라는 사뮈엘의 글을 표절해 소설을 출간했고 집에서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과 바람까지 핀 독일인 여자 산드라로 추락하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을 해부하였지만 사뮈엘과 산드라만 추락하였습니다.

다니엘

다니엘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닙니다. 사건 당시 다니엘은 자신의 개 스눕과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증언을 번복하긴 했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은 가족의 일원입니다. 사뮈엘과 산드라는 다니엘을 낳고 키웠습니다. 비록 불의의 사고로 시력이 손상되었지만 피아노를 칠 수 있을 정도로 교육받았으며 산길을 걷는 것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가족 중 한 사람이 사망하고 다른 한 사람이 살인 혐의를 받게 된 상황에서, 그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자리에서 나온 자기가 알던 가족의 다른 모습에 고통받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다니엘은 증언합니다. 6개월 전 아버지와 동물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스눕과 자신을 동일화하며 언젠가는 떠날 것에 대해 준비해야한다는 말을 했다고 말이죠. 검사는 이 발언에 대해 그저 개인의 증언일뿐이라고 일축하지만 산드라가 무죄 판결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때문일 것입니다.

모호한 결론

어른들이 채우지 못한 빈 칸을 다니엘이 채웠습니다. 그렇지만 다니엘의 말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나요? 우리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가 훌륭하게 빈 칸을 채웠다는 점을 부정할 수도 없죠.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이라면 재능일 것입니다.

​영화는 진실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사실에 대해서도 모호하죠. 다니엘의 스토리텔링에 대해서도 긍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죠. 그 점이 이 영화가 어렵지만 훌륭한 점이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답을 던져주는 것이 아닌 우리가 생각해내게 하는 것이 말이죠.

이미 보신 여러분이라면 본인만의 답을 찾으셨기를, 이 글을 보고나서 보러가신다면 본인만의 답을 찾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 만나요. 빠염!